늘 혼자라고 생각했던 인생에서 갑자기 내가 아닌 타인을 범주에 넣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전화로 잠에서 깨어, 아직 잠 깨지 못한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출근 준비를 하는 것도. 근무 시간에 몰래 핸드폰을 붙들고 시시콜콜한 일들을 얘기하기 위해 손가락을 놀리는 것도. 며칠에 한 번씩은 퇴근길에 반가운 불청객의 납치로 우리 집이 아닌 타인의 집에서 결국 잠들게 되는 것도. 앞으로는 전부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정택운과의 이런 관계의 발전은 분명 바라던 일이고 행복한 일인데, 나는 이상하리만큼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야근으로 늦은 밤, 너 역시 스케줄로 바빠 종일 연락하지 못하다가 짧게 통화를 마치고서 오피스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지친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이윽고 걸음이 멈추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오랜 시간을 넘어 드디어 널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불편하고 공허했던 이유를.
문득 가까워져 있었다. 네 부모님의 기일이.
Paradox 11
w. 새루
하얗고 예뻤던 애기 때부터 시작해서 책가방 메고 학교에 처음 가던 어린아이. 교복을 입고 나선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누가 봐도 대단한 실력으로 축구공을 차며 운동장을 누비던 학창 시절. 막 성인이 되어 풋풋했던 모습, 연락이 끊기고선 영영 못 볼줄 알았더니 갑자기 한 번도 보지 못한 화려한 얼굴로 매체에 나오던 너까지. 솔직히 이 이상 새로운 것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주 크나큰 착각이었다. 연인인 너는 깜짝 놀랄 정도로 새로웠다.
분명 내 집인데 자기 집마냥 자연스레 소파에 누워 책을 읽던 정택운은, 방바닥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던 내 뒷통수에 간간히 입맞췄다. 나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드라마 속 연인의 이별 장면에 짧은 탄성을 내뱉자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아프지 않게 귀를 물어오는 것을 느끼며 슬쩍 입을 열었다.
“너 완전 선수같아.”
“응?”
너는 뜬금 없는 내 말에 크게 눈을 떴다가 이내 소리내어 웃었다. 사실 그 얼굴도 잘생겨서 좀 심술이 났다.
“백 퍼센트야.”
“뭐?”
“인기 많았지?”
“나 참….”
“당연히 많았을 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대체.”
이어지는 말에 해명하려 몸을 반쯤 일으켰던 정택운이 다시 소파에 널부러졌다. 아마도 의미 없는 말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살짝 발끈했다.
“막 늘씬하구 길쭉길쭉한 애들이랑 사귀고 그랬겠지?”
“…….”
“하긴 너 학생 때부터 인기 많았잖아….”
여섯 살이나 어린 애가…. 이런 행동이 그냥 나올 수가 없는데…. 연락 안 하는 동안 애인 많이 사귀고 그랬어? 그럼 TV에 나오는 사람들이랑 만나고 그랬으려나? 하긴 직업이 그러니까…. 조잘조잘, 끝도 없이 길어지는 내 말에 넌 팔을 괸 채 본격적인 자세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근데 막상 그러니까 조금 부끄러웠다. 입을 슬쩍 다물었더니 픽 웃은 네가 나를 끌어 무릎 위에 앉혔다. 나는 더 부끄러워졌다. 집요한 시선을 피하면 촉 하고 입술을 맞춰왔다.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계속해.”
“…뭘 계속해.”
“질투.”
“질투 아니거든?”
갑작스러운 단어 선택에 또 발끈한 내가 고개를 들고 세모 눈을 하려 했다가, 예상치 못한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아, 진짜….”
“왜 또.”
“너 좀….”
“나 뭐?”
…너 진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내가 결국 패배를 선언한 채 하얀 목에 얼굴을 묻으면 너는 청량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서도 애정은 뚝뚝 묻어났다. 정택운은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간지러운 장난을 치다가 천천히 나를 떼어내고 곧장 입술을 맞대왔다. 깊고 섬세한 키스였다. 결국 소파에 드러눕게 된 나는 지칠 때까지 네 입술 공격을 받아내야만 했다.
“왜 이렇게 귀여워?”
“뭐래….”
“그만 좀 귀여워.”
“웩.”
“귀엽지 마.”
아니다, 앞으로 내 허락 맡고 나서만 귀여워야 해. 알았지? …그만 좀 해, 진짜….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도 강아지처럼 내 얼굴 곳곳에 입맞추는 너를 바라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찌할 줄 몰랐다. 행복하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
우리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아주 평범하고 행복한 어느 주말이었다. 이번 주말은 꼭 붙어서 같이 보내고 싶다며 양 손 무겁게 우리 집으로 찾아온 너를 위해, 서툴지만 요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는 소리에 가스레인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내 등으로 이번 부모님의 기일에 함께 가자던 네 목소리가 닿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짝 굳어버린 내게 조심스레 다가온 너는 내 등을 끌어안으며 어깨 위로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나는…. 그 숨결이 너무나도 버겁고 두려웠다. 너무 행복해서 애써 외면하던 현실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널 피했다. 메시지에 부러 늦게 답을 하고 통화도 잘 받지 않는 이유를 너는 분명 잘 알았을 것이다.
너와 헤어지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네 부모님의 기일이 가까워질수록 매일 밤 꿈에서 자꾸 그날이 반복되었다. 그 꿈 때문에 잠에서 깨고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이 길어졌지만, 나는 감히 악몽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여전히…. 네 어머니가 밝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셨기 때문이었다.
‘연아. 학교는 끝났니?’
‘우리 학연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시험 잘 본 기념이니까, 아줌마가 다 사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줌마가 아저씨랑 금방 갈 거니까.’
천천히 오셔도 된다는 내 말은 끊긴 통화음과 함께 사라졌다. 금방 온다던 두 분은 한 시간이 넘도록 오질 않았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짐에 초조해진 내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던 때였다. 분명 익숙한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지만, 통화를 건 사람도 통화 내용도…. 모두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눈앞의 상황이 바뀌고 또 장례식장에서 나보다 한참 작은 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펑펑 울고 있는 내가 있었다. 널 지켜주겠다는 다짐을 하는 나를 바라보던 네가 천천히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뭐라 말하는지 알고 싶은데, 입 모양이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 미간을 잔뜩 찌푸렸던 나는 결국 또…. 잠에서 깨어났다.
만약 두 분께서 그날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시험을 잘 봤다는 핑계로 우리 가족이 저녁 약속을 잡지 않았다면…. 아니면, 처음 이사 온 날에 내가 택운이를 예뻐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루어지지 않을 가정과 바람만 잔뜩 생각한 채로, 또다시 슬플 아침을 맞이했다.
/
네 부모님의 기일. 눈을 뜬 순간부터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너한테 간간히 연락이 왔지만, 오늘은 그 연락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너한테 차마 연락할 용기도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일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억지로 흘려보낸 하루는 아주 최악이었다. 복도를 돌면 6년 만에 재회한 그날처럼 우리집 문 앞에 서있는 긴 인영이 보였다. 하지만 그날과 다른 것은, 오늘은 네가 엉망으로 취해있다는 사실이었다. 집까지 몇 걸음을 남겨놓고 멈춰서자, 천천히 고개를 든 네가 비틀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네게선 짙은 술냄새와 지독한 담배냄새가 풍겼다. 이윽고 내 앞에 선 너는 나와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찌푸려진 미간과 젖은 눈동자까지, 그 모두가…. 전부 사랑하는 것들 투성이었다.
“형….”
“…….”
“이제 나…. 싫어?”
“…….”
“내가, 잘 못했어….”
“…….”
“미안, 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난 대답하지 않은 채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널 부축하려 애썼지만, 종일 그랬던 것처럼…. 너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속이 상했다.
“근데 있잖아….”
“…….”
“형 아니었어도…. 엄마 아빠, 돌아가셨을 거야….”
“정택운!”
“형 때문이 아니야.”
“하지 마….”
“그냥, 그렇게 됐을 운명이었던 거야….”
“그만…. 그만해.”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잖아. 이제 안 계시잖아….”
넌 울면서 내게 매달렸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네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손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택운아, 제발….”
“형…. 살아있는 건 나야.”
“…….”
“지금 차학연 네 눈앞에 있는 건, 정택운….”
“…….”
“우리 부모님 그만 생각하고…. 내 생각도 좀 해주면 안 돼?”
“운아….”
“형….”
“…….”
“나 좀, 흑, 살려줘…….”
오열하던 네가 날 가득 품에 안았다.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뺏기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애달픈 모습이었다. 손을 들어 널 마주 안아주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건지 너는 더욱 세게 나를 안아왔다.
나는 네게 대체 어떤 말을 하게 만든 걸까. 또 어떤 마음을 먹게 만든 걸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택운아. 나는…. 네게 함부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 그저 네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 가족, 친구, 연인.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어떤 형태라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 * *
매번 들고 올 때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잊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네... 아주 간간히 찾아주시던 분들께 너무나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고... 근데 이번 글 보시면 이제 다시는 찾지 않으시고 그러는 건 아닌지...(눈물)
반년?만에 들고 와가지고... 그동안 티톨이 많이 바뀌었네요... 에디터창 아주 거지같다고 욕했었는데... 되게 깔끔해지고 그래가지구 막 좀 익숙치 않고... 이제 제가 거의 포타 위주로 굴리려고 하는데, 여기 방문자 수가 너무 높기도 하고... 올린 글은 마저 계속 올려야하니까는... 이렇게... 티톨에도 열심히... 근데 왠지 더 주절주절 적고 있습니다...
티톨 단점이 비밀로 댓글 달아주시면 본인도 확인을 못한다는 거여서 피드백을 제가 공개적으로 했었는데, 이것도 안변했을라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여튼 이전에 댓글 달아주셨던 분들이 있으니 그 피드백을 여기서나마... 달아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정도비님... 패러독스 수인 정돕이씨 덕분에 11편을 들고 올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당신도 당신 댓글 기억 안나져? 다 알아영ㅋㅋㅋㅋㅋ 하지만 저는 보이니까 제 맘대로 주절거려보고자 합니다. 학연이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글에서 이번 편이 개인적으로는 여태까지 나왔던 글 중에 가장 친절하리만큼 택운이 감정선을 잘 드러냈던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돕이님한테 이번 편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합니다. 약간 핏백 강요같은데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쓰는 입장에서는 제가 쓰는 생각과 또 다른 시점으로 힌트를 많이 얻기 때무네,,, 여튼 반년만에 오긴 왔으니까 봐주시길 바라고 담편은 반년까진 안걸리게 할게영. 이번 편도 부디 재밌게 봐주셨길...
사랑하는 은하수님!... 제가 넘나 면목이 없어요... 하지만 은하수님은 공개적으로 댓 달아주셨으니까... 제가 맘놓고 답변 드립니다 히히 지난 번에 썼을 때가 일루미네이션 웹진 전이었네요 심지엌ㅋㅋㅋㅋㅋ지금은 이제 마지막 웹진을 준비하면서 이케이케 열심히 들고왔답니당 헤헤 겨울이 벌써 다 가고 봄도 다 가버릴 것만 같은 시점에 들고왔고... 또 지난 편의 달콤함에 비해 이번 편은 많이 묵직해졌어요. 제 긴 글은 늘 무겁긴 했지만 이 글은 좀 또 다른 의미로 무거워서 사실 읽어주시는 분들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넘나 걱정이 되지만 은하수님만큼은 언제나 재밌게 읽어주시기 때문에 제가 넘나 감사하고 사랑하는거 아시져? ><
사랑하는 까보님...! 지난 편에 비해 애틋함보다는 애절함이 강해진 택엔입니다,,, 지난번에도 웹진 준비하면서 글을 썼었는데 이번에도 웹진 준비하면서 글을 써가지구 ㅋㅋㅋㅋ 댓글 보다보니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많이 늦은 핏백이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언제나 응원해주시고 좋아해주셔서 넘넘 감사해요 까보님! 이번 편도 늦었지만 봐주시게 된다면 부디 재밌게 즐겨주시길 바라며...(수줍)
사랑하는 YKKK님! 마자여 피지컬부터가 모델포스 뿜뿜인데 솔직히 누가 모를 수 있겠냐구요 정태구니는 지난 편에서 아주 바보사랑꾼이었읍니다,, 이번 편은 울보로 나오는데 넘나 오래 돼서 사실 이 글을 읽어주실지도 모르겠지만 혹여나 읽어주시게 된다면 조금 많이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피드백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사랑하는 요랑애님..!! 맞아요 지난 편에 드디어 돌고 돈 택엔이들이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이번 편부터는 사랑하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택엔을 그려보았는데, 사실 지난 편이랑 온도가 많이 달라서 조금...아니 많이 걱정하구 있습니다 ㅠㅠㅠ... 근데 지난번 피드백에서 제 글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게 보인다고 말씀해주셔서 좀 기뻤어요. 고심해서 쓴 것들을 곱씹어서 읽어주시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ㅠㅠㅠㅠ 정말 요랑애님 댓글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편 너무나 오래 돼서 사실 읽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읽어주신다면 부디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저야말로 넘넘 감사드립니다.. 하튜하튜
아 그리고 뜬금없지만, 형이라 절대 안 부른다던 택운이가 언젠가부터 열심히 형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나름 디테일이거든요. 혹시 알아챈 분들이 계실진 모르겠는데, 그냥...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다음엔 이번보단 빨리 들고 올게요.... 제대 전에 완결을 목표로... 화이팅...!
읽어주신 분들 모두 넘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수줍)

예쁜 선물을 주신 이든님(@Red_edennn) 정말로 감사합니다.

예쁜 선물을 주신 리제님(@jungchannn)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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